[특파원 칼럼] 시대착오적 혐오 경쟁

입력 2019-03-28 17:42  

김동욱 도쿄 특파원


[ 김동욱 기자 ] “젊은 처자들이 독일 놈들을 향해 미소짓네. 고작 빵 부스러기에 독일 것들에게 몸을 판 ×들….”

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로 진군한 옛 소련 ‘붉은 군대’ 병사들은 독일 내 집단수용소에 감금됐던 자국 여성들을 두고 “독일의 노리개였다”고 멸시했다. 그들은 적을 대하듯 동포를 살인과 약탈, 성폭행의 대상으로 삼았다. 해방의 기쁨에 들떠 있던 소련 여성들은 예상치 못한 동포들의 핍박을 받아야 했다.

소련 병사들은 포로로 잡혔던 자국 병사와 독일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했던 자국민에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댔다. 이유를 막론하고 적과 협력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조국을 지키다 산화하지도, 빨치산 투쟁을 하지도 않고 구차하게 연명한 것은 ‘조국의 순수한 아들딸’이라는 이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반일·혐한 경쟁하는 韓日

갑자기 붉은 군대의 행적이 떠오른 것은 요즘 거친 말을 쏟아내는 한·일 양국 정치인이 하는 행동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선명성을 부각하기 위해 당시 상황의 맥락, 그때 그 상황에 놓인 사람의 처지, 상대의 입장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알아도 모른 척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우리 편을 규합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는 속내가 뚜렷하다. 상대는 타도의 대상이며 타협은 곧 매국이다.

한국 쪽에선 문재인 대통령이 반일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 올해 3·1절 축사에서 ‘친일파’와 ‘친일 잔재 청산’을 거듭 강조했다. 경기도의회는 도내 학교가 보유한 284개 일본 기업 제품에 ‘전범 기업 제품’ 스티커를 의무 부착하도록 하는 조례안을 추진하고 나섰다. 온라인에선 ‘토착 왜구’라는 신조어가 넘쳐나고 있다. 전국 주요 중·고교에선 교가 작사·작곡자가 친일파인지 여부를 두고 조사에 들어갔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지 74년이나 됐지만 한국은 홀로 일본을 상대로 투쟁 중이다.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강제징용을 한 일본 기업에 배상금을 물려야 한다는 한국 대법원 판결 후 아소 다로 일본 재무상은 관세나 송금, 비자발급 정지 등 보복조치를 언급했다. 그의 발언이 한국에서 회자되자 집권 자민당은 들뜬 분위기다. 자국 내 지지세력 결집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고노 다로 외무상 등 일본 주요 정치인의 대(對)한국 강성 발언은 ‘단교’까지 외치는 온라인 우익의 과격 발언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일본에서 한국은 이미 ‘가상 적국’ 취급을 받고 있다.

'상상 속 친일파'와 싸우는 문재인 정부

문재인 정부는 한국 사회가 직면한 많은 문제의 뿌리를 친일파 잔재에서 찾고 있다. 한국 사회를 친일파와 독재 권력, 그리고 권력에 빌붙은 재벌이 민족·민주 세력과 지금까지도 대립하고 있다는 사고가 기저에 깔려 있다.

하지만 일본에 빌붙어 이권과 특혜를 얻고 떵떵거리는 ‘친일파’는 관념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일본은 꽤 오래전부터 그 정도로 대단한 나라가 아니었다. 74년 전 쫓겨난 세력에 빌붙을 만큼 기회주의자들도 눈치가 없진 않다.

2012년 집권 이후 줄곧 우경화 노선을 걸었던 아베 정권도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해 ‘외부의 적’을 지속적으로 찾고 있다. 반일 발언이 나오는 한국은 손쉬운 비난의 대상이다.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이런 현상은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일본은 한국이 요구하는 것이 과거사에 대한 진솔한 사과라는 점에는 애써 눈감고 있다.

21세기 한국과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각각 ‘반일’과 ‘혐한’이 돼서는 안 된다. 시대착오적 비난 경쟁은 하루빨리 끝나야 한다.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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